[정영호의 ‘길 따라 물 따라’-(2)] 동학농민혁명 무안순례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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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호의 ‘길 따라 물 따라’-(2)] 동학농민혁명 무안순례 길
  • 무안신안뉴스 기자
  • 승인 2021.02.24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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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곧 하늘’ 인간 평등을 향한 피의 역사
자주농업연구소 정영호
자주농업연구소 정영호

무안신안뉴스는 2021년을 맞아 본지 칼럼니스트인 정영호 씨의 ‘길 따라 물 따라’를 월 1회 게재한다. ‘정영호의 길 따라 물 따라’는 무안의 숨겨진 관광자원을 찾는데 일조하기 위해 마련된 코너다.(편집자 주)

필자가 두 번째 나선 길은 무안 동학 대접주 배상옥장군의 길이다.

동학농민혁명의 잊혀진 영웅 배상옥장군이 1894년 걸어온 길이다. 무안읍에서 출발하여 무안고 앞 붉은고개, 청천리 팽나무와 개서어나무 숲을 지나 청천사, 창포 바우배기를 지나 목포시 대양동, 함평 고막포 돌다리를 거쳐 무안읍 불무다리로 이어진 길이다.

옛 국도 1호선 길을 따라 현 무안고 앞 붉은 고개에 들어섰다. 이곳이 어찌하여 붉은 고개가 되었는지는 무안동학기념사업회 박석면 회장님의 설명을 듣고 나서였다. 나주성 전투에서 패한 농민군이 고막포에서 다시 대참패를 거듭하고 육로로 무안에 도달하여 섬으로 피신하기 위해 창포에 도달하기 전 대기하던 관군 일본군과 맞이한 곳이 붉은 고개 즉 피의 고개다. 수많은 농민군이 학살되었던 피의 고개는 붉은 고개라는 이름으로 역사를 타고 전달되었다. 붉은 고개는 사라졌지만 피 비람이 몰아쳤을 황량한 들판에는 겨울바람만이 매섭게 달려들었다.

동학농민혁명군의 붉은 고개 패전을 안고 청계면 청천리로 향하였다. 청천리 앞 팽나무와 개서어나무 숲 초입에서 청천사로 향하는 길로 접어들었다. 청천리 마을 오랜 역사의 흔적을 고이 간직한 육송군락지 언덕을 비껴지나 청천사에 도착했다. 청천사는 청천리 마을 왼편 즉 동북쪽 나지막한 언덕에 위치하고 있다. 달성배씨 가문 조상들의 위패가 모셔진 청천사에 2007년 후배농민운동가들의 노력으로 배상옥 장군의 위패가 이곳에 모셔졌다.

청계면 청천리 청천사
청계면 청천리 청천사

마을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청천사는 1894년 당시 농민자치기구 집강소로 운영되었다. 또한 주목할 중요한 부분이 잊혀진 영웅 배상옥 장군의 위패가 이곳에 모셔졌다는 것이다. 배상옥 장군의 위패가 모셔졌다는 것만으로도 동학유적지로서 의미가 큰 곳이 청천사다. 청천리 집강소와 함께 운영되어졌을 훈련장 및 보급기지창이 이 일원에 존재했을 텐데 아직까지 입증된 것은 없다.

청천사에서 발길을 돌려 청천리 팽나무와 개서어나무 숲에 이르렀다. 청천리 팽나무와 개서어나무 숲은 처음 보는 이들에게는 생뚱맞다. 청천리 마을입구를 완벽하게 팽나무와 개서어나무 숲이 막고 있다. 처음 보면 육지 한복판에 존재하는 기다란 방풍림 숲이 이해가 안 된다. 역사의 이해가 부족한 탓이다. 500여 년 전 달성배씨들은 이곳에 방풍림을 조성했는데 방풍림은 사라진 창포와 함께 역사 속에서 공존한다.

청계면 청천리 팽나무와 개서어나무 군락지
청계면 청천리 팽나무와 개서어나무 군락지

청천리에서 창포간척지 방향으로 서쪽으로 500여 미터 내려가면 전리마을 사라진 포구 바우배기터가 나온다. 사라진 포구 바우배기는 청천리가 어촌이었음을 증명한다. 창포가 간척되기 전까지 바우배기는 수로를 통해 무안읍으로 가는 최단거리 포구였다. 읍성이 존재했던 무안읍에 물류는 창포 바우배기를 거쳐 전달되었을 것이다. 수백 년 동안 청천리는 무안읍성의 선창으로서 번성했을 것이다.

설을 앞둔 2월 초 팽나무와 개서어나무 숲에 서있노라니 창포를 타고 몰아쳤을 한겨울 북서풍의 위력이 느껴졌다. 팽나무와 개서어나무 숲은 해안가 북서풍을 차단하기 위해 500여 년 전 달성배씨들에 의해 심어졌다고 한다. 팽나무와 개서어나무 숲은 바다와 육지의 경계였을 것이며 청천리의 융성번영을 담고 있다. 무안읍성의 제일포구 선창으로서 청천리는 존재했으며 번영했을 것이다.

바우배기터
바우배기터

그 수로에 배상옥 장군과 장군이 이끌었던 수천 수만 농민혁명군대가 있었다. 창포 배우배기를 통해 무안·신안의 수많은 섬에서 수로를 통해 수많은 농민군이 혁명의 길에 나섰다. 안타깝게도 잊혀진 수로는 패전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고막포에서 밀린 동학농민군은 무안읍성을 지나 붉은 고개에서 다시금 참패를 당하고 창포 바우배기에 이르러 대 참패하고 만다. 일본군과 관군은 바우배기에서 퇴로를 차단하며 농민군을 무참히 학살했다. 세월이 지난 바우배기는 이정표 하나 없고 실개천만이 존재하고 있었다. 실개천 위로 번성했을 무안읍 창포 포구 바우배기가 눈에 겹친다. 매서운 북서풍을 안고 오갔을 수많은 옛사람들의 모습이 선명해진다. 일본군과 관군에 희생되었을 수많은 농민군의 시신이 널브러진 슬픈 바우배기가 다가왔다.

다시 시간을 거슬러 창포가 바다로 남았을 상상에 빠져들었다. 수로를 통해 이어질 문명과 물질 그리고 사람들이 그려진다. 창포는 다시금 기회가 온다면 복원하여 포기하고 싶지 않은 소중한 자원이다.

배상옥 장군의 흔적을 찾아 목포시 대양동으로 향했다. 목포시 대양동 즉 과거 무안군 삼향면 대월리다. 배상옥 장군은 이곳에서 태어나 동학농민군을 훈련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생가 터도 분명하지 않고 장군이 조련했던 농민군 훈련장은 아파트 단지로 변신하여 흔적조차 찾기 어려웠다. 동학의 역사는 100여년 세월 속에서 완벽하게 잊혀져 왔다.

함평 고막다리
함평 고막다리

다시 발길을 돌려 함평 고막포로 향했다. 30분 가까이 차로 달려 나주성에서 밀린 농민군이 또다시 관군 일본군과 일전을 벌인 고막포 돌다리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배상옥 장군이 이끌었던 전남 서남부 농민혁명군은 관군 일본군에 밀려 수없이 강에 수장되었다고 전해진다. 고막포 돌다리 안내문에는 동학의 역사는 오간데 없고 무안 승달산 법천사에 온 원나라 스님이 이 다리를 만들었다는 이야기만이 존재했다. 역사는 시간의 세월이 겹겹이 쌓인 스펙트럼이다.

발길을 다시 무안읍으로 돌려 무안읍 불무다리에 도착했다. 지금 모습대로라면 누군들 이곳에 다리가 있으리라 생각할 수 있겠는가? 불무지는 매립되어 공원과 아파트 단지가 되었고 무안천은 복개되었다. 1894년 말 불무다리에서 일본군과 관군에 붙잡힌 수많은 동학농민군이 처형되었다고 한다. 시체가 겹겹이 시루떡처럼 쌓였다고 전해진다. 고막포 전투 이후 각지에서 붙잡힌 수많은 농민군이 불무다리에서 최후를 맞이하였다. 역사를 거슬러 돌아간다면 무안 땅에 발붙이고 사는 누군들 동학의 유족이 아닌 이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라진 불무다리와 복개된 무안천이 너무도 원망스러웠다. 역사에 근간을 두지 않은 도시계획으로 불무지와 무안천이 사라진 것은 너무도 안타까운 일이다.

패전의 역사지만 우리가 뼛속깊이 새겨야 할 역사가 동학이다. 동학은 자주와 민주로 달려온 한국 근현대사의 뿌리이기 때문이다. 지나온 그 어디에도 무안동학의 역사를 기록으로 남긴 안내표지판 이정표 하나 존재하지 않았다. 이대로 간다면 무안동학의 역사는 사라져 없어질 것이다.

2017년 여름 몽탄 모아도서관 아이들과 무안동학 역사를 찾아 나섰던 무안역사문화탐방이 떠오른다. 역사문화탐방을 마치면서 공교육 차원의 길을 열어야겠다고 다짐했었다. 그리고 지난 시간 동안 음으로 양으로 그 길을 열고자 노력해 왔다. 세월을 두드려 누군가 동참해주길 간절히 바란다.

◆자문(諮問)
 -백창석 전 무안문화원장
 -박석면 무안군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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