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영호의 ‘길 따라 물 따라’-(3)] 의로운 길, 몽탄 차뫼-인평-학산-사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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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호의 ‘길 따라 물 따라’-(3)] 의로운 길, 몽탄 차뫼-인평-학산-사창
  • 무안신안뉴스 기자
  • 승인 2021.03.24 2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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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혁명 불씨, 90년 지나 수세거부투쟁으로 타오르다.

무안신안뉴스는 2021년을 맞아 본지 칼럼니스트인 정영호 씨의 ‘길 따라 물 따라’를 월 1회 게재한다. ‘정영호의 길 따라 물 따라’는 무안의 숨겨진 관광자원을 찾는데 일조하기 위해 마련된 코너다.(편집자 주)

자주농업연구소 정영호
자주농업연구소 정영호

무안군 몽탄면 차뫼 마을은 나주김씨 집성촌으로 마을회관 배후로 옥려봉이 우뚝 솟아있으며 서쪽으로 연증산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다. 남쪽 마을 앞으로는 영산강이 내려다보이며 넓은 들판이 펼쳐져있다. 배산임수의 전형 누가 보아도 참 좋은 마을 터다.

차뫼 마을 회관 앞에 세워진 동학혁명투사현창비에 이르렀다.

현창비는 1996년 차뫼 마을 주민들이 힘을 모아 세웠다고 현창비 뒷면에 기록되어 있다. 비문에는 몽탄 동학접주 김응문 장군의 생애 및 활약상과 차뫼 마을 주민 다섯 분의 활약상이 기록되어 있다. 차뫼 마을의 혁명투사 다섯 분이 함께 1894년 12월 8일 무안 불무다리에서 한날 참수당한 슬픈 역사가 기록되어 있다.

1894년 11월 고막포에서 나주성을 두고 동학농민군과 관군 일본연합군은 전면전을 치른다. 고막포 전투에서 나주성주 민종렬이 이끄는 관군 일본연합군에게 농민군은 일방적으로 패하고 만다. 기록에 의하면 고막포 전투에 집결한 농민군이 2만여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고막포에 집결한 농민군은 나주, 무안, 함평, 해남 등 전남 서남부 농민들로 동학농민혁명은 나라의 주권을 지키고 봉건왕조를 개혁하기 위한 조선민족의 전 민족적 전쟁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농민군의 고막포 패전 이후 일본군과 관군은 합세하여 대대적인 농민군 숙청작전에 돌입한다. 일본 기록에 의하면 당시 무안에서 일본군과 관군에 의해 붙잡힌 동학접주들만 70여명이며 이중 30여명이 불무다리 나 나주성에서 숙청되었다. 그나마 붙잡혀 숙청된 접주들은 기록이라도 남겼지만 수많은 무명농민열사들은 죽음도, 이름도 남기지 못했다.

몽탄면 차뫼마을
몽탄면 차뫼마을

김응문 장군은 몽탄면 차뫼 마을에서 동생 영구, 덕구 그리고 아들 여정, 주민, 효구 등과 함께 농민군을 모아 1894년 백산전투, 황룡강 전투 등 갑오농민전쟁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김응문 가문은 숙청 이후 완전히 몰락하게 된다. 후손들은 한동안 차뫼 마을을 떠나 이곳저곳으로 흩어져 살아야 했다. 지금은 김응문 장군의 4대손(김정희)과 김영구 접주의 4대손(김병기)이 몽탄면 사창 마을에 살고 있다.

차뫼마을에 있는 동학혁명투사현창비
차뫼마을에 있는 동학혁명투사현창비

마을회관에 이르기 전 오른편에 김응문 장군의 생가 터가 나온다. 오래된 돌담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마당 후원에는 커다란 바위가 여럿 놓인 고택이 있는데 고택은 장군 사후에 타인에 의해 지어진 집으로 장군과는 상관이 없다고 한다. 마을회관 앞에서 현창비를 살피던 중 차뫼 마을 부녀회장님을 뵈었는데 마을에서 매년 6월 6일 현충일에 추모제를 모셔오다 지난해부터 정월대보름으로 옮겨 지내는데 코로나19로 올해는 쉬었다고 한다. 올해부터 무안군에서 지원을 해주기로 했다는 말씀을 하시는데 제발 차뫼 마을 동학 역사를 알아달라는 듯 한 여운이 남았다. 이곳에서도 역시나 무안동학과 관련 행정의 역할은 찾을 수 없었다. 타 지역에 그 흔한 추모비는커녕 안내표지판 하나 찾을 수 없다.

인평마을에 있는 효자최공기실비
인평마을에 있는 효자최공기실비

차뫼 마을에서 발길을 돌려 바로 옆 인평마을을 찾았다. 차뫼 마을을 비롯해 사창, 인평, 학산 마을 등 몽탄 지역 여러 마을에서 김응문 장군과 함께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했던 농민투사들의 이야기가 유족들을 통해 전해온다. 그 중에 한분이 인평마을 출신 효자 최윤삼 공으로 동학에 참여하여 붙잡힌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불속에 뛰어들었다. 그의 효행을 기리기 위한 효자최공기실비가 인평마을 위쪽 언덕에 위치하고 있다. 원래는 최씨 후손들이 세운 효자각안에 함께 존재하였는데 몇 해 전 마을쓰레기장을 세우는 마을사업 과정에서 효자각은 허물어지고 비만 이곳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아쉬움을 넘어 참담함이 밀려왔다. 마을이장과 행정이 함께 했을 텐데 그들은 도대체 무엇을 고민하였을까?

인평 마을은 저자가 학창시절인 90년대 학생농활 활동을 나왔던 마을이다. 차뫼 마을에서 고개를 넘으면 학산 마을인데 학산 마을 또한 사창 차뫼 마을과 함께 전대협, 한총련 학생농활 활동이 길게 이어졌던 마을이다. 농민운동가 최종률씨에 의하면 대학생농활은 80년대 중반에 시작되어 90년 중반까지 십여 년간 이어졌다고 한다.

의로운 역사는 시대를 초월해 공존한다. 인평, 학산, 사창은 현대 농민운동사에 중요한 역사적 의미가 있는 마을이다. 동학혁명이 지난 90년 후 1985년 인평, 학산, 사창의 의로운 농민 최종률, 최병상, 김병기, 김유식 등은 농지개량조합의 부당한 수세문제를 제기하고 전국 최초로 수세투쟁을 조직한다. 전두환 군부독재의 서슬이 시퍼런 85년 몽탄역 앞에서 몽탄 농민 50여명이 전국 최초 수세거부 집회를 조직하게 된다. 1894년 일제와 조선 이씨왕조에 의해 무참히 살육당한 동학혁명의 불씨는 90년이 지나 다시금 수세거부투쟁으로 대중적으로 타오른다. 차뫼 마을 김영구 접주 4대손 동학유족인 김병기를 비롯한 의로운 농민들은 일제가 남긴 식민잔재인 농지개량조합의 수세거부 투쟁의 불씨를 일으킨다. 수세거부 투쟁은 80년대 내내 전국적으로 활활 타올라 이 힘으로 농민회가 결성되며 전농이 만들어지게 된다.

밀리터리테마공원
밀리터리테마공원

인평에서 발길을 돌려 사창으로 향했다. 우명산을 뒤로하고 밀리터리테마공원이 보인다. 밀리터리테마공원은 사창마을 출신 호담 옥만호 장군의 헌신적 노력으로 호담항공우주전시관이 세워지고 이후 무안군의 노력으로 폐교인 몽탄북초와 합하여 밀리터리테마공원으로 조성되었다.

봄 햇살이 따스하게 내리쬐는 3월 어느 일요일 오후 공원에는 아이들과 함께 나온 가족단위 관광객들로 붐볐다. 아이들을 만나게 되니 반가움과 동시에 씁쓸함이 치밀어 올랐다. 차뫼, 학산, 사창 동학유적지 농민운동유적지에는 안내표지판 하나 없었다. 우리가 누리는 평화는 갑오년 우리 동학 농민들의 피의 대가다. 또 지금 우리가 누리는 민주주의는 군부독재에 맞선 농민운동의 헌신의 대가다. 사창은 군부독재와 맞서 싸우다 돌아가신 무안농민열사 고 김길호 열사가 살다 돌아가신 마을이다. 그러나 마을 어디에도 김길호 열사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무안군이 복원한 사창역
무안군이 복원한 사창역

밀리터리테마공원을 거쳐 옛 사창역 앞에 도착했다. 폐 철도부지에 무안군의 지역개발 사업으로 옛 사창역사가 복원되고 열차카페와 공원 등이 조성되었다. 무안군은 철도의 추억을 소환하기 위해 이사업을 추진했다고 한다. 여기 언저리 어디쯤 김길호 열사의 집이 존재했다고 들었다. 만감이 교차하였다.

역사와 문화는 늘 현재를 통해 시공간적으로 공존한다. 역사를 바로 세워야 올바른 문화를 세울 수 있고 그 문화의 힘으로 사회는 성장하여 나아갈 수 있다.

무안행정의 현대식 개발 사업에는 늘 역사와 문화가 별개로, 아니 역사가 방치되어 있다. 지금도 늦지 않았다. 방치해왔던 역사를 찾아내 길을 열고 현대의 문화와 접목시켜 나가야 한다. 밀리터리테마공원을 찾는 이들에게 ‘무안의 의로의 길’을 알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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