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영호의 ‘길 따라 물 따라’-(4)] 삼의사의 동학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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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호의 ‘길 따라 물 따라’-(4)] 삼의사의 동학길
  • 무안신안뉴스 기자
  • 승인 2021.04.20 1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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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농업연구소 정영호

배상옥·김응문 장군이 지나온 동학혁명길에 이어서 필자가 마지막으로 찾아 나선 동학길은 해제면 석산마을 해주최씨 삼의사의 동학혁명길이다.

무안지역에서는 대부분 형제나 부자가 함께 동학혁명에 나서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배상옥 장군 형제와 김응문 장군 형제, 부자에 이어 해주최씨 삼의사 장현·선현·기현은 형제관계였다. 선현은 장현의 동생이며 기현은 장현의 사촌동생이다. 해주 최씨인 이들은 장현의 할아버지 때부터 석산마을에서 터를 잡고 살아오면서 1894년 농민군이 기포하자 주변의 농민들을 모아 동학혁명에 참여하여 맹활약하였다.

봉대산성
봉대산성

나뭇잎이 초록으로 눈부시도록 빛나는 4월 중순 해제면에 도착하여 봉대산에 올랐다. 2005년 봉대산 정상에서 잠들어있던 백제시대 산성이 처음 발견되었다.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 의하면 1596년에 장군께서 이곳에 오르셔 왜적에 대비하셨다는 기록이 존재한다. 봉대산이 역사 속에 잠든 것은 그 이후이니 최소 400여 년 동안 잠들어 있었다.

봉대산에서 바라본 석산마을
봉대산에서 바라본 석산마을

봉대산 정상에서는 해제반도를 중심으로 둘러싼 모든 바다가 한눈에 들어왔다. 남쪽으로 압해도까지 길게 보이며 동쪽으로는 칠산바다와 함평, 영광이 한눈에 들어온다. 비전문가가 보아도 이곳이 군사적으로 전략적 요충지이었음을 쉽게 감지할 수 있었다. 봉대산에서 서쪽으로 석용마을이 보이고 민대뜰과 아시레 염전 그리고 임치진성이 가까이 보인다. 산성은 말없이 오랜 세월동안 외적에 맞선 자주독립의 길고 긴 항전의 역사를 보아왔을 것이다. 400년 전 왜군과 맞섰던 이순신 장군과 전라도 땅 백성들 그리고 120여 년 전 침략군 일본에 맞서 장열하게 싸운 농민군의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았을 것이다.

임치진성
임치진성

봉대산에서 내려와 봉대산을 끼고 돌아 임치진성으로 향했다. 임치진성이 폐진 된 것은 1896년의 일이다. 동학혁명이 발생하고 두해가 지나서 일본에 의해 조선의 진들은 강제 폐진 된다. 폐진 전까지 첨사가 다스리는 군성으로 500여년 가까이 조선 수군의 오래된 주요 주둔지 중 하나였다. 성안 관아 자리에는 친일파 김성규의 묘가 자리하고 있었다. 조선말 무안 6대 감리로 온 김성규가 임치진성을 개인 사유지화 시켜버렸고 건물들은 철거되고 심각하게 훼손되어 방치되고 있다. 무안군에서 입구에 세워둔 안내판이 없다면 이곳이 과거 조선의 성이라고 판단하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김성규의 묘
김성규의 묘

이순신 장군이 1596년 봉대산과 이어 이곳에 들리셔서 하룻밤을 묵고 지나셨다고 한다. 다시 쳐들어올 왜적을 방비하기 위함이셨다. 임치진성과 동학군의 관계는 기록으로 남겨지지 않았다. 1894년 당시 첨사가 수군과 함께 주둔하고 있었던 것으로 본다면 전주화약 이후로 동학군과 임치진성 사이에 화약이 이루어지고 이곳 임치진의 해로를 통해 해제의 동학군들이 동학혁명에 참여하였을 것이다. 군선이 드나들고 동학군이 드나들었을 포구자리는 지금은 간척으로 논으로 변하였다.

임치진성 앞 포구에 즐비했을 군선들과 이순신 장군 그리고 동학혁명에 참여했을 농민군이 겹쳐진다. 자주독립의 기치 하에 임금을 제외한 모든 백성이 하나였다.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된 사대의 나라 조선의 임금들 선조와 고종의 비굴한 모습도 그려졌다. 또 조선 수군과 동학군을 짓밟고 서며 역사를 유린한 친일파 김성규의 더러운 모습이 상상 되어졌다. 역사의 승자는 자주독립을 외쳤던 민중이 아니며 나라를 팔아먹은 친일역적들이다. 현대에 와서도 여태껏 외면당하고 있는 임치진성을 나와 석산마을로 향했다. 임치진성에서 석산마을이 잘 보인다.

석산마을 표지석
석산마을 표지석

석산마을입구에 이르러 동학길이라 새겨진 커다란 마을표지석 앞에 섰다. 해주최씨 유족들의 말에 의하면 동학길은 무안군 전 문화원장인 백창석 선생의 노력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도로명 주소를 만들면서 동학길로 제안하여 행정에서 받아들여졌다고 한다. 동학길을 따라서 가다보니 오른편 간척지에 아시레 염전이 보인다. 이곳 염전 간척지를 조성하면서 임치진성의 돌들이 사용되었다고 들었다. 한없이 참담함이 밀려왔다. 민대뜰을 지나 석산마을에 이르니 커다란 해주최씨 삼의사 추모비가 나왔다.

삼의사 추모비
삼의사 추모비

추모비는 2020년에 유족들의 노력과 무안군의 지원에 의해 세워졌다고 한다. 삼의사의 생애와 동학혁명 당시 활약사가 정리되어 있었다. 추모비 바로 뒤로는 1973년에 후손들에 의해 세워진 해주최씨 삼의사 실존비가 있다. 73년은 박정희 정권의 유신독재의 서슬이 시퍼렇던 시기이다. 한국을 대표하는 친일파 박정희와 친일정권인 박정희 정권의 유신독재 하에서 후손들은 일본에 맞선 동학혁명의 역사를 기록한 실존비를 세웠다. 후손들의 기개와 용기에 놀랐다. 삼의사의 동학 활약사는 후손들의 노력에 의해 지금까지 전해지게 된 것이다. 무안 땅에서 동학에 참여해 일본군과 고종의 관군에 붙잡힌 접주만 70여명인 것을 보면 동학은 전 민족적 전쟁이었다. 그러나 기록되고 역사를 타고 전해지는 접주는 몇몇이 되지 않는다.

삼의사 실존비
삼의사 실존비

추모비 앞으로 민대뜰이라 불리는 넓은 들판이 펼쳐져있다. 유족들에 의하면 민대뜰은 삼의사와 배상옥 장군이 동학군의 훈련장으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그 규모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동학군은 민대뜰에서 훈련하고 임치진의 해로를 통해 동학혁명에 참여하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1894년 12월 말 삼의사 처형 이후 해주최씨 가문은 풍비박산 났다고 한다. 다행히 지금까지 삼의사의 생가가 후손들에 의해 보존되고 있다. 그리고 마을 안쪽엔 동학샘이 존재한다. 동학도들이 이곳 우물을 사용하였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보존이 아쉬웠다. 기왕이면 재대로 복원하고 보존해왔으면 좋았을 것이다.

민대뜰
민대뜰

2021년 다시 찾아 나선 무안 동학농민혁명의 길은 전 민족적 민중적 항쟁의 길이다. 무안 땅에 살아가는 모든 이가 동학의 후예이다. 기록과 구전으로 남겨진 혁명열사들의 정신을 기린다. 또한 기록에 남겨지지 못한 수많은 농민군의 명복을 빈다.

동학의 길을 새로이 열고 후손들에게 동학의 정신을 가르치는 것이 남겨진 후손들의 마땅한 도리일 것이다. 여전히 자주독립은 민족적 숙원과제이다. 미군에 넘겨진 군사작전권이 조속히 반환되고 자주독립과 함께 통일된 조국의 부국강병을 염원해 본다.

무안 동학혁명순례 글을 쓰는데 도움주신 많은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자문 박석면 무안동학혁명기념사업회장, 조기석 향토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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