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영호의 '길 따라 물 따라'-(5)] 월선 기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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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호의 '길 따라 물 따라'-(5)] 월선 기행기
  • 무안신안뉴스 기자
  • 승인 2021.05.18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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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농업연구소 정영호

무안의 명산 승달산 서남쪽에 있는 청계면 월선리를 찾았다.

월선이라는 이름만 들으면 애잔함이 든다. 대학 시절 읽었던 박경리 소설 「토지」 속에 용이와 월선의 눈물겨운 사랑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특히나 월선의 마지막 모습은 너무도 눈물겹다. 「토지」 속의 월선과 무안의 청계면 월선리는 다르지만 연결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월선’이라는 이름은 늘 내게 애잔함이다.

김우진 초혼묘
김우진 초혼묘

윤심덕의 남자 김우진의 초혼묘 위치해

월선리는 승달산이 남쪽으로 낮고 길게 뻗어 내린 골짜기로 산세가 빼어나고 물이 좋은 고장이다. 월선리 주민이자 월선리 예술인촌의 개척자 중 한 명인 김대호 교수와 함께 월선리 최남단 말뫼 산에 올라 김우진의 초혼묘를 찾았다. 김우진의 초혼묘는 말뫼 산 정상 서쪽에 있었다. 이곳에 김우진의 묘를 쓴 사람은 아버지인 안동 김씨 성규라고 적혀 있었다. 정조 서거 이후 조선의 권력을 사유화한 권문세도가 안동 김씨들은 세도정치로 조선을 완전히 망치는 일등 공신이었다. 김성규의 가문은 대를 이어 권력의 노른자위를 취했고, 김성규는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그런 아버지를 김우진과 다른 자식들이 전혀 닮지 않았다는 점이다. 일제 강점기 조선 최초 천재 극작가 김우진은 일본에서 윤심덕과 사랑에 빠졌다. ‘사의찬미’라는 공전의 히트곡을 남긴 그녀와 우진은 스물아홉 나이에 현해탄에 몸을 던졌다. 김성규는 그런 김우진의 혼을 불러 김우진의 첫째 부인 정씨와 함께 합장해 묘를 남겼다. 묘 앞 나무만 없다면 서해바다가 한눈에 들어오는 자리였다.

김 교수는 이런 김우진의 이야기로 초혼묘라는 이름을 만들고 김우진 백일장을 만들었지만, 행정의 무관심으로 목포시에 차지가 된 것을 안타까워했다. 또한 윤심덕 테마공원을 월선리에 만들고자 하였으나 행정은 관심이 없다고 했다. 자원이 있어도 쓸 줄 모르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초혼묘에는 전국의 문학인들과 김우진 윤심덕의 팬들이 수없이 문학기행을 오고 있다.

월선리 전조단
월선리 전조단

무안군 마을만들기·작은학교살리기 운동의 산증인

말뫼 산에서 내려와 월선마을 입구에 자리한 전조단에 이르렀다. 월선리 마을 사람들은 조선 영조 임금 때부터 유월 유두날에 마을 차원에서 전조제를 지내고 있다. 밭의 신을 섬기는 것이다. 아주 이례적이고 훌륭한 문화적 자원이다.

전조단을 지나 마을 중앙의 하마비를 거쳐 예술인촌에 이르렀다. 하마비와 함께 월선리 곳곳에 수많은 제실이 월선리가 얼마나 유서 깊은 마을인지를 알려주었다. 예술인촌은 무안군 마을만들기 운동의 산증인이자 역사이다. 94년 수입 개방이 본격화되고 정부의 농업 규모화가 추진되면서 근대적 농경 마을공동체가 서서히 붕괴하여가는 과정에서 새로운 마을만들기의 시도가 이루어지는데 월선리 예술인촌이 그중 하나이다. 성패 여부를 떠나서 여전히 진행형이며 과제라 본다.

옛 어린이도서관
옛 어린이도서관

당시 공동체 운동의 흔적 어린이도서관을 만났다. 지금은 폐가가 되었지만, 어린이도서관 간판이 걸려있었다. 월선리에 있는 청계남초등학교는 권역별 마을만들기 운동과 함께 작은 학교 살리기 운동의 대안이던 시절이 있었다. 그 중심에 월선리 마을도서관이 존재하였다. 도서관에서 추억을 만들었던 아이들은 이제 대부분 성인이 되었다. 청계남초등학교는 이제 마을 아이들과 목포지역 통학생이 섞여 운영되고 있다. 마을과 지역 운동에서 교육 문화 복지공동체의 과제는 영원한 진행형이며 과제이다.

월선리 한옥마을
월선리 한옥마을

월선리의 또 다른 시도인 한옥마을의 풍경이 아름답다. 특히 저수지 둑에서 바라다 보이는 풍경이 빼어나다. 한옥마을 조성을 통해서 많은 새로운 이주민이 들어왔고 지속해서 새집이 들어서고 있었다. 마을의 땅값은 상승했고 마을은 농경 공동체를 넘어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남은 과제는 단순 농촌거주지를 넘어서 마을 안에서 공동체를 어찌 세울 것인가? 이다. 앞으로 5년 후 마을의 모습이 궁금해졌다.

수월동 등에 고려 시대 절터 흔적

북쪽으로 승달산을 따라 골짜기 길을 타고 한참을 지나 수정동을 지나고 다시 수월동 마을에 이르렀다. 수정동 마을은 샘을 뜻하니 좋은 승달산의 물을 바탕으로 지은 마을 이름이다. 승달산이 북쪽에 모산으로 버티고 남쪽이 골짜기로 길게 활짝 열린, 누가 보아도 고대 절터가 있음직한 마을이 수월동이었다. 수월동 골짜기를 타고 매화가 드넓게 밭을 이루고 있었다. 초봄에 오면 풍경이 대단할 것 같았다. 수월동에는 지금은 한 집이 남았는데 역시 여기에 고려 시대 절터가 존재했다고 한다. 절은 예상대로 남쪽을 향해 존재했다고 한다. 곳곳에 절터에 쓰였을 기단석이 널브러져 있었다. 기단석의 규모를 보니 상당히 큰 규모의 절터였음을 짐작하게 하였다.

수월동 염주나무
수월동 염주나무

원나라에서 오백 제자를 데리고 고려로 넘어온 원명 스님은 승달산 곳곳에 절을 열었다. 목우암은 다행히 현재까지 남겨진 사찰이며 총지사를 비롯해 우적동, 수월동 등등 곳곳에 고려 시대 번성했을 절들은 하나둘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조선의 과도한 억불정책의 작용이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역사를 되찾으려는 시도는 없다. 수월동 절터 인근 집 뒤로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 중 하나라는 염주나무와 주변의 수많은 고목, 고차수 등이 역사를 고이 간직하고 있었다. 승달산이 명산임을 원나라에서 건너온 원명 스님과 오백 제자들이 입증했다. 그 시대를 넘어 현재 우리는 ‘승달산을 어찌 대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받고 있다. 골프장 정도로 승달산의 가치를 훼손해서는 안 된다.

수월동에서 내려와 월선 다목적회관에 이르렀다. 다목적회관에서는 행사가 진행되는지 차량이 많았다. 마을과는 상당히 동떨어진 위치에 존재하는 마을만들기 운동의 거점으로 세운 궁궐 같은 다목적회관이다. 이 공간이 마을의 공동체를 회복하는 중심이 되길 간절히 바랐다.

월선마을 다목적회관
월선마을 다목적회관

마을 기행을 마치고 출출해진 속을 달래기 위해 장부다리 식육점으로 옮겼다. 돼지고기 강제예냉제가 시행되기 전 돼지고기 육회로 유명했던 집이다. 승달산 등산객들이 찾는 유명한 무안의 맛집이다. 지금은 돼지고기 육회보다는 돼지고기볶음이 유명하다. 돼지고기 육회는 전라도 음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소중한 음식문화이다. 그러나 정부의 위생을 빌미로 한 강제예냉제 시행으로 비위생적 음식문화로 취급되고 있다. 전라도 대표 음식문화 돼지고기 육회가 그리워졌다. 어릴 적 아버지를 따라 논일을 가면 늘 참으로 먹던 돼지고기 육회가 떠올랐다. 아마도 수많은 전라도 사람들의 추억이 담겼을 것이다.

하루를 보내기에 월선 기행은 너무도 훌륭하다. 마을에는 수많은 이야기와 볼거리가 역사로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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