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영호의 길따라 물따라(11)]무안읍을 걸어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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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호의 길따라 물따라(11)]무안읍을 걸어보다.
  • 무안신안뉴스 기자
  • 승인 2021.11.17 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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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농업연구소 정영호

무안 문화와 역사, 정치, 경제의 중심 무안읍을 걸어보았다. 이틀에 한 번꼴로 무안읍을 삼십 여년 가까이 다녔지만 정작 모르거나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곳들이 너무도 많았다.

무안성당
무안성당

무안의 향토사학자 조기석님과 함께 무안읍을 걸어보았다. 무안성당에서 출발했다. 무안성당은 이내수 신부님이 우적동 본당을 세운 이후 몽탄 성당이 세워졌고 그 다음으로 무안에서 세 번째로 일제강점기에 세워진 성당이다. 아직도 일제강점기에 세워진 건물의 골격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는 근대문화유산이다. 무안성당에서 성동공원으로 향했다. 성동공원은 일본인들에 의한 수탈의 현장이며 무안국악원과 약사사가 함께 존재하는 무안읍을 대표하는 도심공원이다. 정상에는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심어놓은 단풍나무 숲이 잘 보존되어 있다. 삼향읍 군산동 목포시 제3수원지에 존재하는 단풍나무수종으로 단풍나무로 인해 일본식 공원의 느낌이 묻어난다. 성동공원은 그 옛날 무안읍성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위치에 존재하고 있다. 성동공원에서 군청방향으로 조금 돌아내려가니 무안군립국악원이 있다. 무안을 대표하는 문화공간의 일부인 국악원의 건물 위치가 동북향이어서 아쉬운 느낌이 들었다.

무안군립국악원
무안군립국악원

국악원의 반대방향으로 내려가니 약사사가 나온다. 약사사를 둘러싼 전통담장이 멋스러웠다. 약사사에 들어서는 순간 도시 사찰의 느낌을 받았다. 그리 넓지는 않으나 잘 정돈되어 보는 이에게 편안함을 안겨주었다. 전라남도 도지정문화재인 약사사석불입상은 중생을 질병에서 구원한다고 하니 무안 땅의 평안과도 상통하는 듯하다. 성동공원과 국악원 약사사로 이루어진 공간은 지친 심신을 달래주기 좋은 산책공간이다.

약사사
약사사

약사사에서 나와 발길을 버스터미널로 향했다. 버스터미널 입구에는 5.18사적비가 있다. 80년 5월 21일 버스터미널은 무안의 본격적인 항쟁이 시작된 역사적인 공간이다. 터미널은 또한 군부독재시절 김대중 전 대통령이 오셔서 수만 인파가 군집했던 민주의 공간이다.

무안 낙지골목
무안 낙지골목

터미널 옆 낙지골목으로 들어섰다. 중고등학교 시절만 해도 터미널 바로 옆 골목에는 몇몇 상가들이 낙지며 숭어 같은 무안의 해산물을 팔던 곳이었다. 무안 뻘낙지가 본격적인 인기수산물이 된 것은 90년대 이후다. 그러면서 점차 뻘낙지 인기와 비례해 낙지골목 또한 번성해 갔다. 무안의 대표 수산물하면 낙지와 숭어, 감태, 장어, 김이라 할 수 있겠다. 올해는 지난해에 비해 낙지 값이 두 배 이상 고가인데도 낙지골목 상인들에게 물어보니 찾는 손님이 더 많다고 하셨다. 지역에 관광객들이 늘어나는 일은 좋은 일이다. 경찰서 뒷길 전체 낙지골몰은 정비 사업이 한창이었고 조금은 어수선했다.

낙지골목을 지나 맘마트 방향으로 접어들었다. 이곳은 터미널 옆 중앙로 상권이 쇠퇴하고 현재 실질적인 무안읍의 대표 상권이다. 대형마트들이 즐비하고 구 전통시장이 이전되면서 무안보건소와 꿈틀이 복합문화센터가 내년 5월 말 완공을 목표로 건립 공사 중이다. 공사가 끝나면 이거리가 더욱 활성화 될 것으로 기대된다. 옛 전통시장 상가 안에 지금으로부터 20년 전 농민운동의 꿈을 품었던 무안군농민회 사무실이 있었다. 30대 초반 청춘을 불살랐던 추억들이 되살아났다. 하루에도 두세 번 이상 사무실과 이곳 주변 식당들을 드나들면서 농민운동에 청춘을 받쳤다.

유산정
유산정

신 중심상가를 지나 교육청 옆 유산정으로 향했다. 고려 충열왕 때부터 시작된 무안의 최고 권문세가였던 무안박가 박문오 유산정유적비에 이르렀다. 평야지대에 야트막한 동산위에 위치하고 있다. 전망이 좋은 곳이다. 점심시간에 잠시 차 한 잔과 함께 산책을 즐기기에 더없이 좋은 공간이다.

유산정에서 보니 교육청 자리가 더없이 좋아 보인다. 유산정과 향교가 가까이 있으니 어찌 보면 교육청이 자기자리에 제대로 위치한 것 같았다.

무안향교 600년된 은행나무
무안향교 600년된 은행나무

유산정을 내려와 무안향교로 향했다. 향교 앞에 무안북중 그리고 옛 무안종고, 공공도서관이 존재하니 예나 지금이나 이곳이 교육의 공간임에 틀림이 없는 것 같다. 무안향교는 조선태조 때 건립되어 이전과 함께 조선후기 여러 번 중수되어 지금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향교 앞에는 관리들이 말에서 내려 걸어가라는 하마비가 존재한다. 조선시대 대부분의 고궁이나 서원이 그러하듯이 3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선비들이 수학했던 명륜당이 중앙에 위치하고 사이에는 600년 된 은행나무가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으며 제일 위쪽에 위패를 모셨던 대성전이 존재한다. 무안향교는 무안에 존재하는 역사유적 중 가장 잘 보존된 고궁이기도 하다. 무안에 유적이 부족하기도 하지만 전반적으로 관리나 보존이 너무도 아쉬운 상황이다.

무안향교 앞 하마비
무안향교 앞 하마비

무안에 그 옛날 존재했던 송림서원에 대한 얘기를 나누면서 길을 나섰다. 무안 문화재단의 필요성에 서로 공감했다. 올해 무안 각 지역을 여행하면서 무안의 역사와 문화를 전담할 공적 조직의 필요성을 절감하던 터였다.

발길을 불무공원으로 옮기면서 자연스럽게 매립된 불무지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했다. 사라진 무안읍의 호수 불무지는 90년대 중반 매립되어 공원과 승달문화예술회관, 아파트가 만들어졌다. 이곳에 만약 불무지 호수가 그대로 남겨졌다면 무안읍을 대표하는 명소가 되었을 것이며 도시는 한껏 아름다웠을 것이다.

무안버스터미널 앞 5.18 사적비
무안버스터미널 앞 5.18 사적비

아쉬움을 뒤로 성내리로 들어섰다. 무안읍 행정구역 지명에 성내리 성남리 성동리가 있는데 이것은 조선시대 무안읍에 존재했던 무안읍성에서 유래된 지명이다. 무안읍성 남쪽은 성남리이고 읍성 동쪽은 성동리다. 성내리는 무안읍성의 안을 말하는데 무안읍성의 중심은 지금의 초등학교 자리였다. 이곳에 관아와 동헌이 존재했다. 그리고 성곽외벽길이가 3.7km에 이르는 무안읍성이 존재했다. 1967년 지금 무안군청 자리로 군청이 옮겨가면서 무안읍성 또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고창에 갈 때면 제일 부러운 것이 고창읍성이었다. 무안에도 무안읍성이 보존되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하는 미련을 가져 보았다.

무안읍은 급격하게 농촌지역이 쇠퇴하는 과정 속에 최근 아파트가 급속도로 늘어나고 상권 또한 확대되고 있다. 초 고령화 사회에 진입하면서 향후 십년 후 무안읍의 모습과 무안군의 모습이 희미하게 상상되어졌다. 도청소재지 남악신도시 개발로 인구는 늘고 있지만 무안의 정체성은 갈수록 쇠퇴하고 있다.

문화와 역사의 출발은 일상에서 우리 것에 친숙하고 우리 것에 정통하는 것이다. 우리 주변에서 일상적으로 마주하는 것들을 사랑하고 지켜나가는 것이 미래를 담는 담보일 것이다. 가끔은 후대들과 우리 땅을 걷고 살피며 우리 땅에 애정을 키우는 것이 지역교육의 출발이다. 올해가 가기 전 무안읍을 한번 걸어보시라.

※자문: 향토사학자 조기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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